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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필이 볼펜을 이긴 날
    카테고리 없음 2024. 1. 27. 19:28

    저는 떠오르는 잡 생각이 예전부터 많았고, 전에는 그 기록을 공책들에 남겼습니다. 어떤 공책들은 너무 오래되어서 열어보는 상상만해도 민망함이 전신을 뒤덮습니다.

     

    그런 공책 중 하나를, 아주 뒤늦게 베란다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거기에 박아둔 것이었죠. 슬프게도 베란다는 습기가 자주 차서 공책은 이미 곰팡이와 물기로 뒤덮였습니다. 바짝 말려보았지만, 몇몇 페이지는 가루가 되어 흩날릴 정도였습니다.

     

    슬픈 마음으로 힘겹게 페이지를 넘겨보는데, 대부분의 글씨가 번져서 더 이상 알아볼 수도 없는 상태에서 몇몇 구절은 또렷이 글씨가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HB 0.5mm 샤프심으로 쓴 글씨들이었습니다.

     

    재밌지 않나요? 볼펜은 힘껏 문질러도 번질 뿐 지워지지 않고, 연필자국은 조금만 건드려도 흑연을 비비는 꼴이되어 순식간에 뭉개집니다. 그러나 정작 거대한 물벼락 속에서 살아남아 저를 위로해주는 것은 그 흑연 가루들 뿐이었습니다. 지워지기 쉬운 것이, 지울 수 있는 것이 결국 마지막에 홀로 남았습니다.

     

    나는 그 날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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