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모니터 너머에 있는 것이 로봇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카테고리 없음 2025. 4. 6. 00:23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일상화 된 시대다. 퇴사할 때나 되서야 얼굴을 알게 되는 동료도 존재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슬랙이나 이메일로만 소통을 하다보면, 그 뒤에 기계가 아니라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망각할 수도 있다. 농담이 아니다. 진짜, 저 상대가 내가 원하는 요구사항을 넣으면 처리해주는, 자연어 처리를 기막히게 잘하는 챗봇 정도로 여기게 된다. 그런 인식이 머리를 지나가기 시작하면, 조금이라도 내 말을 이해 못하거나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때 화가난다. 당연한 결과다. 세탁기에서 시작 버튼을 눌렀는데 20초 동안 응답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나였으면 5초 정도 지났을 때 이미 두어번 때려봤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무의식적으로 자라난다. 2025년의 현대 기술은 글씨에 감정과 표정을 담아내..
-
컴퓨터세탁소가 AI세탁소가 되는 순간카테고리 없음 2025. 3. 31. 22:02
어릴 때 컴퓨터 세탁소라는 것이 동네에 한 두 개 있었다.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대체 컴퓨터 세탁소라는게 뭔지 참 궁금했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 "컴퓨터 세탁은 기계가 자동으로 해준다는 의미에서 컴퓨터 세탁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는 컴퓨터의 개념을 자동화된 기계로 이해하면서 ‘컴퓨터 세탁’이라는 재밌는 용어가 탄생했습니다." 즉,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멋진, 최첨단의 무언가를 '컴퓨터'라고 부르는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세대가 볼 땐 귀여운 시도일 뿐이지만. 현 시대에선, 'AI'라는 단어가 그 위상을 물려받은 것 같다. 우리 뭔가 대단한 것 합니다 (그래도 이번엔 실제로 하기라도 하면 다행인 것 같다) 라는 말 대신 AI 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광..
-
낭만 코딩의 시대는 끝났다카테고리 없음 2025. 3. 18. 22:06
각각의 마이크로서비스에 히어로 이름을 붙이는... 그런 낭만 — 다른 말로는 오글거리는 긱(geek)함 — 은 이제 거의 다 종말한 것 같다. 인증 서버는 auth 라고 부르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나의 앞의 앞 세대는 스프링을 곱게 쓰는 경우가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대체품을 만들거나, 하다못해 스프링을 랩핑한 무언가를 만들어 전사적으로 사용했다. 내가 회사를 다니기 시작할 때 그것들은 이미 입 밖에 내는것도 어색한, 입 밖에 나올 정도면 이미 그는 동정을 받아야되는 ("그걸 건드리게 되시다니... 고생하세요..."), 그런 분위기였다. 그땐 그런 것들이 어리석어 보였다. Spring 에 붙어있는 개발팀과 자원봉사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신토불이 외치듯이 우리 것을 만들려고 하는거지?..
-
기술적 성장은 환상입니까카테고리 없음 2025. 3. 10. 22:14
IT 회사에서, 개발자로서, 기술적으로 성장한다는게 가능할까? 기술적으로 성장한다는게 뭘까? 회사의 내부 툴들(의 이용법)을 훤히 꿰고 있고, 이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더 복잡하고 세밀한 코드를 짜면 기술적으로 성장하는걸까? 조금 더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AB180 이라는 스타트업은 OLAP 데이터베이스 Luft를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사용중이다. 그럼 내가 이 회사의 서버 개발자로 입사한 후 Luft 개발팀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Luft 개발팀으로 입사하는 것은 가능할까? 나는 이 지점에서 매우 패배주의적인 논리에 부딪혔다. Luft 팀에 합류할 수 없다는 말은, 내가 회사에서 그런 복잡한(?) 데이터베이스를 개발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다는 뜻이다. 합류할 수 있다는 말은,..
-
다같이 웃을 땐 누구나 커뮤니케이션 고수가 된다카테고리 없음 2025. 3. 5. 12:51
분위기가 좋을 땐 모두가 커뮤니케이션을 잘 한다. 서로 어떻게든 이해해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실수 정도는 하하호호 웃으면서 지나갈 수 있다. 이해가 안되는 문장이어도 한 번 더 상대 입장에서 곱씹어 번역해보려고 노력하고, 그래도 이해가 안될 땐 그냥 긍정적인 쪽에 맞춰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제안하거나, 남에게 무언가 시켜야 하거나, 안된다고 말하거나, 불리한 조건을 유리하게 바꾸는 것. 그런 상황에서는 표정, 톤, 문장, 단어, 제스처 등 모든 것이 미묘하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머리아픈 계산을 해야한다.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상대는 어떻게든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스탠스로 문장을..
-
더 이상 배울 게 없어서 퇴사한다는 것이 당최 무슨 말이지카테고리 없음 2025. 3. 2. 17:46
그 어떤 곳에서도, 그 어떤 환경에서도, 그 누구에서라도,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이 속한 팀과 문화에 대해서, 일하는 회사에 대해서, 회사가 속한 산업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다면, 그렇다면 어깨를 으쓱할 수 밖에 없겠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그런 이해의 지평이 말도 안되게 느껴질 뿐이다. 하는 일이 똑같다면,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 더 좋은 방식으로 — 개선하면 되는 것 아닌가. 개선할 수 없다면, 적어도 시간은 더 확보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매일매일 '힘든' 업무를 해 나가면서 배울 게 더 이상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무언가 학습하는 방법을 그만큼 적게 알고 있다는 자백이지 않은가. 한 번도 '배울 게 없어서 퇴사'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여전히..
-
백의 그림자 를 읽고독서 2025. 2. 23. 22:21
기본적으로 이 책은 용산 전자상가의 철거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읽지 않고 두 남녀의 담백한 사랑 이야기로 읽어도 별 무리가 없었다. 좌우간, 관계 속에서만이 힘겹게 다시 움직인다는 점은 별 차이가 없으므로.멍청하게도 다 읽고나서 눈치챘는데, 제목의 백(百)이 white 가 아니라 hundred 였다.우리 모두는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저자의 조용한 속삭임.쇄골에 대한 대화도, 가 동(洞)에 대한 서사도, 오무사에 대한 묘사도 좋았다. 짧고 몽환적이고 어딘가 우울한 그런 문체다.이 책을 다 읽을 때쯤, 수십 분 만에 서너가지 글감이 떠올랐다. 하나같이 어느 이름없는 소시민을 다루는 짧은 망상들이었다. 나는 자칫하면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알기에 구태여 그걸 써보려는 치기를 발휘하지 않았다.